화요일, 1월 20

뜨거운 책의 뜨거운 글들






 정서적 연결은 커다란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관객들을 활동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바로 이 정서적 연결이 관객들을 삶의 인식과정에 참여시킨다. 왜냐하면 정서적 연결은 주제로부터 미리 짜여진 결론 도출에 의존하거나, 작가의 경직된 지시에 의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묘사된 현상의 더 깊은 의미를 감지하도록 도와주는 것들은 자유롭게 관객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이나 서정적인 세계관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지나치게 분명하고 공공연한 틀 속에 짜맞추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직접적이고 일반적이며 진부한 결론 도출의 논리는 기하학적 공식의 증명을 연상시키는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다. 이에 반해서 예술에 있어서는 삶의 이성적, 감정적 평가들이 서로 결합되는 연상적 연결들이 의심할  바 없이 훨씬 더 풍족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 가능성을 그렇게 드물게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길을 택하는 것이 종래의 전통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약속해 주기 때문이다. 정서적 연결이야말로 영상을 빚어내는 원료들이 그 찬란한 제 빛을 낼 수 있게 하는 내적인 힘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한 대사에 관해 동시에 모든 것이 말해지지 않는다면, 무언가 덧붙여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결론은 관객들에게 모든 사고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대두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이 경우, 결론을 아무런 고민 없이 제공받기 때문에 관객은 이 결론을 가지고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게 된다. 작가가 관객과 함께 한 장면을 창조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즐거움을 나눠 갖지 않는다면, 작가가 과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 시작 부분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삶의 본질과 자기 자신, 자신의 가능성과 목적을, 그때마다 새롭게 인식한다.  그런 인식 과정에서 인간은 기존에 축적된 지식을 총체적으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도덕적 자기 인식이라는 것은, 매번 새롭게 겪어야만 하는 그때그때의 경험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며, 이 세계를 획득하려는 고통스런 요구에 내몰린 채, 자신이 직관적으로 감지한 이상과 이 세계를 조화시키고자 애쓴다. 이 채워질 수 없는 요구야말로 인간적 불만과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통의 영원한 원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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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 태어나고 발전되는 곳은 다름아닌 정신적인 것과 이상을 향한 저 영원하고 쉴새 없는 동경이 가득 찬 곳이며, 에술의 주변으로 인간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곳이다. 단지 독자성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의미를 찾는 맹세를 파기한 현대 예술이 제시한 길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창조적 행위라는 것은 단지 그들의 자기 중심적인 행위의 일회적인 가치의 정당성만을 추구하는 기이한 사람들의 이상한 짓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는 개성이 진실임을 판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좀더 보편적이고 좀더 높은 이념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예술가란 자기 자신에게 마치 기적과 같이 부여된 재능에 대해 소위 관세를 물어야만 하는 하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오로지 희생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점을 점점 망각하고 따라서 우리들의 인간적인 결정을 위한 감정조차도 잃어버린다.

같은 책,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서의 예술 부분